세상의 편견을 깨고 나아가는 용기, 이지호가 말하는 나의 삶

음악 산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시만의 길을 당당하게 나아가는 그의 삶의 철학과 비전을 들어보았다.

 

제이앤엠뉴스 |  스스로를 용감한 개척자라 소개하는 제이앤엠엔터 이지호 대표, 디지털음원유통사와 음원기획사를 운영하며 인디음악 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고, 동시에 학업적, 아티스트적 목표도

놓지 않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그의 솔직하고 담대한 인생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유년시절과 꿈의 씨앗]

 

Q. 어린시절 이지호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어떤 꿈을 꾸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어린시절부터 방송이나 음악 등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아티스트가 되는 제 모습을 상상 하곤 했습니다. 우선 워낙에 집안 분위기에서부터 부모님이 항상 음악과 영상미디어를 사랑하고 즐기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 또한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아빠가 항상 7080 포크 음악, 팝송, 클래식 들을 아주 큰소리로 틀어 놓으셨죠, 그 덕에 제 일상도 음악과 가까워 질 수 밖에 없었어요 지금 저의 삶의 큰 방향을 잡아주신 분으로 엄마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엄마는 감성이 굉장히 풍부하신 분이세요, 노래를 부르거나 예술미디어를 접하는 것을 정말 사랑하셨죠, 평소에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굉장히 즐겨 보셨어요 보통 그냥 스치듯 보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그 내용과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고, 영화 혹은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말 진정성 있게 느끼고 저와 동생에게 가르침을 주셨죠, 이런 환경에서 영향을 받고 교육을 받다 보니 예술이라는 것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 많은 드라마를 봤지만 지금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민기선배님 유진선배님 류진선배님이 출연하셨던 MBC 드라마 진짜진짜 좋아해 라는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제가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 그 시작이 될 수 있었던 마현권 선생님의 “눈물이 하는 말” 이라는 노래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저는 이런 환경에서 7080 음악들과 드라마, OST 들을 통해 제 안에 있던 아티스트의 꿈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집안 분위기가 그래도 와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데, 이런 걸 보면 저는 제 안에 정말 뜨거운 예술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음악, 삶의 멜로디가 되다]

 

Q. 어릴적 시작된 꿈이 대학을 가기까지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떤 시간들을 보내오셨는지요?

 

A. 천운이게도 꿈을 쉽게 찾았지만, 현실에 벽에 부딪히는 시간이 오래 이어졌어요 부모님이 어려운 길보다는 안정적인 길을 가길 원하시기도 했고, 중요한 건 일단 제가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릴적에는 제 안의 표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쉽게 내보일 자신이 없었고,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개발을 하고자 하면 일찍이 학원도 다니고 레슨도 받고 해야했는데, 제가 그렇지 못했고 부모님도 그런 저를 완전히 알지 못하셨고 그 과정 중 과학교육도 받고 그안에서 로봇개발 교육, 프로그램언어 교육 등 카이스트를 목표로 부모님이 진로를 잡길 원하셔서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전부를 그 시간에 받쳤어요, 잠깐 자랑을 좀 해드리자면 그동안 상도 많이 받고 당시에 EBS로봇파워라는 프로그램도 나가고 전국대회 은상도 받고 나름 잘 나갔었어요 ㅎㅎ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는 점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렇게 멀리 돌아돌아 그 첫 시작이 중학교 2학년때였어요, 큰 용기를 내어 그렇게 처음 실용음악학원을 등록하고 배우고 싶었던 노래, 기타, 피아노, 화성학 등을 열심히 배웠어요,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ㅎㅎ 너무 하고 싶었고 애살이 있어서 정말 금방금방 습득하고 빨리 성장하고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름 7080포크감성이 그대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정도로 노래를 곧 잘했어요,

 

 이렇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점점 없던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매번이 쉽고 수월하진 않았지만,, 그때부터는 그래서 친구들 앞이나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한번 하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 다음은 조금 더 수월하고 자연스러워 졌던 것 같아요,

근데 과감한 용기의 순간도 잠시, 여전히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시절에 접어들면서는 다시 한번 혼란이 왔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생각들이 많아졌고, 과연 예술이라는 것을 하여 전공을 하고 사회로 나갔을 때    

 

 그 험난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당장 밥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개척할 수 있는가에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죠, 그러다 결국은 현실적인 길을 배재할 수가 없어 제가 할수 있는 안정적인 길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영상계열 미대, 영상디지인을 전공해 제가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하면서도 기술을 배워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그래서 이 전공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죠,

 

그렇게 학원을 아마 1년정도를 다녔을거에요,,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줏때 없이 한 우물만 파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보기 안좋다, 끈기 없다, 제 학창시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한참 많을 때 였고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때 였어요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여러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더 나의 길이 명확하고 구체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쑥쓰럽네요 맞습니다. 다시 음악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강인한 마음으로 굳게 다잡고 조금 더 진지하고 엄숙하게 임할 수 있었어요 포기도 없었구요, 새로운 시작은 너무 재밌었어요, 입시미술학원을 그만두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라는 사람은 원래 음악과 때 놓을 수가 없는 사람인데, 그걸 때 놓으려고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어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렇게 저는 온전히 저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증명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정말 많은 뮤지컬을 봤던 것 같아요, 삼총사, 그리스, 몬테크리스토, 마타하리, 레미제라블, 젝더리퍼, 영웅 등 이요 제가 엄기준선배님, 김산호선배님, 민영기선배님 옥주현선배님, 정성화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제 선택은 성악을 기반으로한 표현력 좋은 뮤지컬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성악과 진학을 목표로 입시를 최종적으로 준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정말 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서 발성에 대한 공부와 연구로 당당하게 성악과 하이바리톤으로 진학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도전과 성장의 하모니]

Q. 대학이후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A. 아 ㅎ 정말 무지막지하게 또 폭풍 같은 많은 일들이 있었죠                                                

입시를 준비하고 성악과에 입학을 하면서 또 한번 어린 저에게는 절망적인 사건들이 찾아왔었어요, 평소에 사실 잔병치례가 많고 몸이 또래에 비해 엄청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지도 않아서 다니던 한의원이 있었어요, 근데 어느날 선생님이 보시더니 근육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대학병원에서 한번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구요,

 

근데 사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기회가 되서 대학병원에서 신체 정밀 검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죠, 근육조직검사와 근전도검사 등 각종 여러 종합 검사들을 했는데,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근육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강 정리를 하자면 핵심증상은 근육이 쉽게 발달되지 않고, 수축과 이완이 불규칙적이며, 퇴화가 빠르다는 내용인데요 병명은 근이영양증, 분류상 희귀병이라고 하더라구요,,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현재까지 특별한 치료법과 완치 사례가 없고 평생 달고 가셔야 하는 병입니다. 환자마다 증상과 케이스가 조금씩 다 다르지만 심하면 심부전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근육관련 기능 장애로 인해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거였죠, 하지만 사실 저의 경우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긴 한데, 세세하게 운동을 해도 근육발달이 잘 되지 않거나, 몸이 쉽게 피로해진다거나, 근육수축이완이 원활하게 잘 안되서 시간이 지날수록 경직이 심해질수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기에 심각한 증상으로 급격하게 몸이 안좋아져 나빠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하시더라구요

 

 이 말을 듣고 저는, 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우선 1차적으로 당장 목숨에 큰 위협이 있는 건 아니니 정말 감사할 일이고, 천만 다행인건 맞지만,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근육컨트롤이 나의 제어 안에서 해결이 안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거든요 신이 있다면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이제 뭔가 시작해보려니 뭔가 모두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겉잡을수 없는 도피와 대인기피 기나긴 방황을 하면서 다니던 성악과는 중퇴를 하게 되었죠,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난뒤 저는 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 들이기로 어렵게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길은 마련을 해야했기에 다시 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야에 참여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방송영상미디어과라는 전공으로 대학을 새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경기도 여주라는 지역에서 새로운 마음을 잡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과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 불안정한 상황들과 낯섬이,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이제껏 음악만을 생각하고 공부해온 제가, 사진, 영상, 광고미디어라는 새로운 주제의 제가 깊이 공부해오지 못했던 분야의 전공이지만, 총체적으로는 제가 알고 싶었던 분야이기도 하고 크게는 같은 예술인이라는 시각에서 이런 분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어서 행복했고, 같이 소중한 시간을 나눌수 있어서 감사했고, 제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알게 될 수 있어서 영광이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목아박물관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시 제 업무와 박물관 운영과 관련된 홍보를 전담하는 일이었죠, 방송영상미디어과에서 배운 부족하지만 나름 전문적인? 기술로 영상도 찍고, 포스터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홍보물을 만들고 사실 그때 박물관에서의 분위기와 환경, 최연소 직원이라는 위치가 저 성향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죠,

 

 이때 사실 저는 원래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제가 보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물론 박물관 일도 보람차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나도 이제 완전한 직장생활을 한다는 느낌에, 마음 한구석에는 틀에 박힌 생활을 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조금씩 병행 해야겠다는 마음에, 근처 실용음악학원에서 제가 조금 배워보고 싶었던 것을 더 배워보고자 찾아가서 원장님께 상담 받고 등록을 하게 되었죠,

 

 원장님의 첫인상은 굉장히 강렬했어요 굉장히 강인하고 독립투사 같은 이미지에 신뢰감이 많이 들었죠 ㅎ 지금은 형님 동생하며 종종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정말 어려운 시기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시죠, 당시 사회적으로 이혼이 이제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성격차이로 많이 힘들어하시다가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되었는데, 아직 갈피를 못 잡고 마음이 방황하는 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생기게 된 셈이었죠,

 

 그로인해 저희 집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 제가 여러 알바를 병행하면서 생활하고 지내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때 그래서 안해본 알바가 없는 것 같아요, 고기집 부터해서 물류센터, 골프장, 마트캐셔, 지역축제 스탭, 봉투공장, 가구공장, 드라마촬영장 스탭 같은 일들을 했었죠,

 

 여주에서 살 때 금전적으로도 도움 받고 거의 같이 살다 시피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주에서 있었던 일들 중 정말 이 학원을 다니면서 저에게 뜻 깊은 인연이 또 한번 생기게 되었는데요, 제가 처음 가수의 꿈을 꾸게 만들어주셨던 가수 마현권 선생님이 이 학원에 출강을 해오고 계셨더라구요 처음엔 저도 이렇게 만난다는 상황자체가 너무 신기했어요,

 

 이렇게 인연이 닿는다는 게 뭔가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에게는 노래가 아닌 프로듀싱과 창작으로 다시 한번 음악적인 꿈을 다시 꿔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고, 선생님 과목을 수강해 많이 공부 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위로와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인생수업도 많이 해주셨죠, 그렇게 마현권선생님과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저에게는 한 명의 또 제 인생의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좋은 시간을 통해 저는 또 다시 결심하게 되었어요,

 

 비록 내가 이제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 할 순 없지만 노래를 이전처럼 못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다시 저만의 방식으로 예전의 기량을 찾을수도 있는 것이고,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프로듀싱을 하고, 창작을 하고, 제작을 하며 함께 할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이 원하는 마음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을 해보기로 하고 음원유통사라는 새로운 시작점에 서게 되었죠,

 

 새로운 시작과 함께 이때 이사를 하게되요, 여주에서 일산으로 가게되었죠, 음악사업을 하고 새로운 학업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권으로 이사를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때 새로운 준비와 더불어 음악비즈니스와 관련된 대학원진학을 하고자 하였는데, 지금까지 받은 학위는 전문학사학위라 4년제 학사학위가 필요했죠, 그래서 대학교에 편입하여 일과 학업을 병행하게되는 시간을 또 길게 보내게 되었어요,

 

 사실 하고 싶은 공부였기 때문에 즐겁고 보람찬 학업이었지만 실상은 너무 많은 알바와 일들을 병행하면서 학업에 완전히 전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학점에는 좋은 성적을 받진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꾸역꾸역 하고 해내고 싶었고, 누군가는 핑계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고 저에게 그 상황은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원하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까지 성공하게 되었죠, 굉장히 행복했어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정]

 

Q. 어렵게 음악사업을 시작하게 되신 것 같아요 사업을 하면서 겪으셨던 어려움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들이 있을까요?

 

A. 음악사업의 시작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전쟁이었죠 ㅎ 저의 생각은 큰 자본없이 안정적이고 꾸준한 자금력을 만들고 다양한 아티스트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획사, 매니지먼트 같은 회사는 시작하려면 보세요, 사무실 있어야죠, 연예인 매니징하려면 로드매니저 있어야죠, 차 있어야죠, 하다못해 밥값, 메이크업비에, 당장 일을 하려해도 제작사나 방송국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죠, 생각만해도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리 거든요,

 

하지만 저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고, 음악이 소비 또한 디지털화 되어 안착되어 있잖아요, 저희 음악산업구조는 음악을 흔히 아는 멜론, 지니 같은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게 하려면 음원유통사라는 중간 출판 업체를 거쳐야만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음원유통업체는 크고 작은 다양한 회사들이 있지만, 이 업무를 시작하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죠 온라인으로 음원 자료를 전달 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 그리고 컴퓨터 이 단 2가지만 있으면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이거다 싶었어요,

 

 간단하게 시작해서 차근차근 네트워크도 만들고 저의 이력도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저는 음원유통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사를 하고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ㅎ 하지만 현실은 또 녹록치 않았죠 어디서 어떻게 계약을 하며, 그 연락처는 어디에 있으며, 안다고해도 계약조건이 무엇이며, 이외에 수십 가지의 필요조건에 대해서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이업종이 굉장히 흔한 업종도 아니었기에, 공공연하게 나와있는 공식적인 자료도 당연히 없었어요, 주변에서도 너 지금 무슨 헛발질 하고 있는 거냐 허황된 꿈 꾸지 말고, 그냥 착실하게 직장이나 다녀라고 그러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제가 또 다시 돌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죠, 저는 이제 돌아설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 모든 것을 걸고 매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업계의 1부터 100까지 제가 조사하고 시도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막무가내식으로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1년을 보냈죠,

 

 그렇게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새로운 시작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어요, 원하고 원했던 멜론, 지니, 벅스, 플로, 바이브, 해외사이트 들과의 계약에 성공하게 된거죠, 저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믿고 달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자, 용기 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완전히 제 인생이 달라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이때부터 저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죠, 저는 이 업계에서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고, 최고의 서비스로 자리잡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처음에는 저의 그 열정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많이 찾아주시고, 입소문을 통해 점점 많이 찾아주시기도 하셨죠, 그런데 음원유통사라는 곳은 중간 유통업체이기 때문에 수수료로 수익을 내는 구조라, 이 수수료율이 전체 음원매출 에 비해 적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무명가수들의 음원만으로는 앞으로의 지속과 유지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팬덤이 조금 있는 아티스트와 작업을 해야 조금 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운영이 가능할 것 같아 아티스트들을 다시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가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을 위주로 컨택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오디션스타, 히트곡스타, 트로트스타 등 여러 영역의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봤죠, 정말 좋은 일도 많았고, 좋지 않은 일도 많았어요

 

 김명기 선생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은데요, 제가 록음악을 정말 좋아했기도 하지만, 정말 학창시절부터 매일 끼고 살고, 수백 수천번을 따라 부르며, 그렇게 존경하는 가수 선배님 이시라 첫만남부터 너무 행복했고, 일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지만, 일적으로도 인생적으로도, 항상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인생 선생님이시구요, 선생님의 일생 동안의 모든 앨범들을 저에게 믿고 다 맏겨 주셔서 지금까지도 정말 큰 힘이 되고있고, 아마 평생을 보답해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의 의도를 좋게 해석하고 좋은 마음으로 함께해주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죠, 사업을 하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도 부족하고, 내가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세상에는 좋은 마음으로 함께하며 애쓰고 희생까지 감수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믿어준 사람에게 돌변하여 배신하고, 남의 노력을 한번에 가로채고, 책임은 회피하며, 단기적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지혜롭게 그런 사람들을 대처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터득해야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세상이 팍팍해도 지켜야될 신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신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확하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일 수 있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을 믿고 함께해온 사람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고 무참히 무시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기적으로 단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람을 상황에 따라 쉽게 대하고, 언젠가는 얼마든지 입장이 바뀔 수도 있는데, 그런식의 관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관계중심적 비즈니스에 중요성입니다.

 

 좋은 품성과 태도의 사람들은 관계를 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시너지를 내고, 이런, 사람를 중요시하는 모습들이 좋은관계와 그들을 좋은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원래 이 업계는 그런거야”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거죠,

 

 

 

Q. 현재 정기적으로 작품활동 및 음원 기획과 유통을 하고 계시고,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음악은 이지호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그 어떤 말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음악은 제 삶의 가장 큰 위로이자 표현의 도구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작품활동도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음원유통과 기획 제작을 하면서 정말 음악을 사랑하고 진정성있게 음악을 하는 인디뮤지션들에게 좀더 나은 음악시장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선적으로 저는 현 한국의 음악산업 실태에 대해 많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래 음악이라는 것은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를 듣는 주체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 받고, 힐링하며, 힘을 내고 에너지를 받곤 합니다, 이런 본래의 선순환적인 구조가 어느순간부터인가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자체만으로 리스너가 온전히 그것을 느끼고 소통하며, 소비되고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센가 부턴가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대형 레이블들 음반위주의 노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동일한 형식의 음악들과 매번 동일한 노출, 그로인한 세뇌, 이런것들로 인해서 더 이상 창조적이고 신선한 음악컨텐츠가 순환되지 않고, 항상 그저그런 음악의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패턴이 이제는 조금이라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일을 하면서 인디뮤지션들의 음악이 선순환 될 수 있도록 인디음악차트와 음원사용료정산시스템 등 플랫폼을 개발해 항상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고, 언젠가는 크게 이 판도가 한번 뒤집어 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쉽진 않지만 저는 계속 노력할거구요,

 

 앞으로도 갈길이 멀지만, 초등학교 어린 아이가 꾸던 작은 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너무 감사하고, 오늘도 수고한 저의 노력을 응원하고 싶구요, 앞으로도 더 성장 하고 발전하는 저를 위해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꿈은 기다리는게 아니라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싶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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