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앤엠뉴스 | 매일 아침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지하철을 탄다. 같은 골목을 걷고, 같은 편의점을 들른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모두가 휴대전화를 바라본다. 지하철에서는 옆 사람의 얼굴보다 작은 화면이 더 익숙하다. 카페에서는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연결은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시선과 관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낸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뉴스와 수천 개의 게시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타인의 삶은 알고 있지만,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모르는 시대다. 무관심은 갑자기 생긴 감정이 아니다.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공감하고, 모든 사람을 신경 쓰며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하루는 너무 빠르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도 있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아이가 울면 누군가 먼저 다가갔다. 골목에서 넘어진 사람을 보면
제이앤엠뉴스 | 인터넷에서는 이름보다 아이디가 먼저 보인다. 누군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의견을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단 한 줄의 댓글로 타인의 하루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쉽게 하지 못할 말을 온라인에서는 너무도 쉽게 내뱉는 모습을 우리는 이제 낯설지 않게 마주한다. 도대체 사람은 왜 익명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달라지는 걸까. 익명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내부 고발자는 익명성을 통해 부당함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사회적 약자는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익명은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다. 문제는 익명이 책임감까지 지워버릴 때 시작된다. 얼굴이 보이지 않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지 쉽게 잊는다. 상대를 한 명의 사람이라기보다 화면 속 하나의 계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온라인 탈억제 효과(Online Disinhibition Effect)'라고 설명한다. 현실이라면 스스로 제어했을 감정과 표현이 온라인에서는 훨씬 쉽게 표출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인
제이앤엠뉴스 |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만 터치하면 음식이 도착하고, 원하는 물건은 다음 날이면 집 앞에 놓여 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스트리밍으로 바로 재생되고, 궁금한 것은 검색창에 몇 글자만 입력하면 수초 안에 답을 얻는다. 기술은 분명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편리함은 어느새 우리에게 '기다리지 않는 습관'도 함께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기를 원한다. 메시지를 보내면 즉시 답장이 오길 기대하고, 취업도, 승진도, 투자도, 인간관계도 가능한 한 빨리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기다리는 시간은 과정이 아니라 낭비처럼 여겨진다. 문제는 인생은 기술처럼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신뢰가 쌓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관계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느린 과정을 견디기보다 결과가 늦으면 실패라고 판단하고, 조금만 답답해도 방향을 바꾸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숏폼 콘텐츠의 확산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몇 초 안에 재미가 없으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고, 자극적인 정보만 반복해서 소비하다 보니 긴 글을 읽거나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하는 능력은 점
제이앤엠뉴스 | 누군가가 목표를 이루었다는 소식보다 실수를 했다는 뉴스가 더 빠르게 확산되고,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는 이야기보다 논란이나 사고가 훨씬 많은 관심을 받는다.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이슈나 SNS의 인기 게시물을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실패에 이토록 쉽게 시선을 빼앗기는 것일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기쁜 일보다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왔다. 먼 과거에는 위험을 빨리 인식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능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좋은 소식보다 사고와 갈등, 실패 같은 부정적인 이야기에 더 쉽게 관심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생존 본능만으로는 지금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는 또 다른 심리가 작용한다. 바로 비교다. 누군가의 성공은 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만들지만, 누군가의 실패는 상대적인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부른다. 타인의 불행이나 실패를 보며 무의식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현상이다. 물론 대부
제이앤엠뉴스 | 조직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일이 몰린다. 맡은 일을 제시간에 끝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누군가 놓친 부분까지 알아서 챙기는 사람에게 중요한 업무가 주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일을 잘했다는 이유로 또 다른 일이 주어지고, 책임감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몫까지 맡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왜 열심히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또 다른 일이어야 할까. 조직에는 종종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에게는 높은 기준이 적용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낮은 기준이 적용된다. 평소 일을 잘하던 사람이 한 번 실수하면 “왜 이번에는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는 이야기를 듣지만, 늘 실수가 잦았던 사람이 무난하게 업무를 마치면 “이번에는 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기대의 차이가 평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누군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조직은 업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는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대부분 일을
제이앤엠뉴스 | 음악산업에서 ‘함께하자’는 말은 참 자주 등장한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말, 서로가 가진 강점을 합치자는 말,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하자는 말. 음악이라는 일이 본래 여러 사람의 능력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인 만큼 ‘협업’은 이 산업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중요한 단어 중 하나다. 하지만 수많은 제작과 유통 현장을 경험하다 보면 가끔 이상한 협업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분명 상대방이 하나의 ‘기회’를 가지고 찾아온다. 좋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거나, 가능성이 있는 아티스트와 작업하고 있다거나,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와 업계 경험을 통해 앞으로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다 보면 이야기가 묘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완성된 프로젝트의 유통을 맡기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어느 순간 제작비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함께 부담해달라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상대방이 대부분의 자금을 부담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전제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투자에 따른 권리와 수익배분을 이야기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용
제이앤엠뉴스 |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진정성’이라는 말을 한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수많은 어려움에도 자신의 작품을 지켜왔다는 이야기, 돈이나 성공보다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까지. 그러한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음악을 향한 한 사람의 오랜 열정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음악산업의 현장에서 몇몇사례들을 지켜 보면 때때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음악에 대한 진정성은 자신의 작품을 대할 때만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작품을 만들 때는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집요하게 고민하고, 연주 하나와 소리 하나에도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조금의 부족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사람이 비용을 받고 타인의 작품을 맡으면 그 기준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인 연주 오류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채 결과물이 전달되기도 하고, 음악의 리듬과 다이내믹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이 끝났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업자가 조금만 더 집중해서 모니터링했다면 발견할 수
제이앤엠뉴스 |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다 보면 누구나 실수한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어쩌면 실수의 횟수가 아니라 그다음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에는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자신이 먼저 무례한 말을 했는데도 상대가 예민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한다. 반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면 오히려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갈등의 원인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왜 그럴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상황 자체를 다르게 해석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상대가 먼저 나를 화나게 했다." "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이
제이앤엠뉴스 |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은 사람의 조건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배려와 친절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다른 장면을 마주한다. 늘 양보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일을 떠안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이용당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이 오히려 상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왜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 이유는 착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함과 희생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문화에 있다. 배려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에서 빛난다. 하지만 일방적인 희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균형을 무너뜨린다. 내가 계속 참고, 계속 맞춰주고, 계속 양보하는 관계는 언젠가 반드시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배려가 반복될수록 상대가 그것을 '고마움'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미안해, 부탁 좀 해도 될까?"라고 말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부탁은 권리가 되고, 배려는 의무처럼 변한다. 관계가 무너
제이앤엠뉴스 | 우리는 언제부터 결과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을까. 시험에서는 몇 점을 받았는지가 중요하고, 회사에서는 얼마의 실적을 냈는지가 먼저 평가된다. 스포츠는 승패로 기억되고, 콘텐츠는 조회 수와 구독자 수로 가치를 판단받는다. 어느새 과정은 참고사항이 되었고, 결과는 사람을 정의하는 기준이 됐다. 물론 결과는 중요하다. 사회는 성과를 통해 발전하고, 노력은 결국 일정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문제는 결과가 중요해진 것이 아니라, 결과만 중요해졌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오랜 시간 실패를 반복한 끝에 단 한 번의 성공을 이뤄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수없이 도전했지만 끝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 담긴 고민과 성장보다 마지막 결과 하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문화는 교육 현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생이 얼마나 성실하게 준비했는지보다 시험 성적이 먼저 이야기되고, 직장에서는 협업 과정이나 책임감보다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가 우선시된다. 과정이 보이지 않는 평가 방식은 때로는 더 큰 노력을 가려버리기도 한다. 성과 중심 문화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